문득 핸드폰을 든다. 문자를 적어 보낸다. 별 시덥잖은, 그렇고 그런 안부문자. 답을 기다린다. 내내 답을 기다리다 정다운 이모티콘이라도 찍힌 답이 오면 기분이 환해진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전화든 문자든, 그때 그때의 말씨, 목소리. 그 순간 상대가 처한 상황이나 기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기 마련. 그 순간의 반응이 나를 대하는 상대의 진심, 그 전부일 수는 없다.
나는 이렇다 할 벗이 없어서, 그리고 돌아가는 세상에 영 둔감해서 잘 모르는 세계지만 요즘은 메신저니 무슨무슨 톡이니, 트위터니,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낱낱 공개하고 그것에 대한 반응을 구하는 수단이 더 늘어난 것 같다. 수시로. 무시로. 때때로. 빠르고, 간편하게.
'수단'은 이윤을 쫓아, 광고를 타고, 퍼지고 퍼져, 이제 세상을 집어삼킨 모양새다. 나의 필요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느 새 그것들은 내게 와 필요를 요구한다. 반응이 느리면 찍힌다. 반응을 구하는 게 느려도 찍힌다. 반응이 없어도 찍힌다. 반응을 구하지 않아도 찍힌다. 반응과 반응의 연쇄. 큰 의미없는 한 순간의 멘트에 여러 사람의 반응이 달라붙고 나면, 그 멘트는 나의 일부가 된다. 반응은 나를 이루고, 반응의 연쇄는 세상을 이룬다. 그러나 반응은 순간. 반응을 구하는 것도 순간. 그것으로부터의 낙오가 낳는 것은 사회적 고립. 그보다 심한 외로움. 소외.
과거에는 어땠을까. 어렵게 편지를 적어 멀리 우체통에 넣으면, 몇일이 지나야 상대의 손에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이 들릴 수 있던 시절. 누군가를 떠올리고,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정돈하여 어딘가에 적고, 그것을 마주하는 그는 어떨지, 그의 안에 떠오르는 나는 어떨지를 오래 생각할 수 있었던 시절.
그때라고 '우리'라는 존재가 뭐 그리 달랐겠냐마는, 그때의 그들에게 있었을 텅빈 시간, 때론 답답하게 느껴져도,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익히거나 추려낼 수 있는 여백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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